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드 케네디 (문단 편집) === 1960년대: 정계 진출 === 1959년 로스쿨을 졸업한 테드 케네디는 더욱 적극적으로 지역 정계에 진출할 야심을 보였다. 지역 유지들과 함께 스키를 타고 파티도 하면서 친목을 다지는 한편,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며 견문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유력 신문인 [[보스턴 글로브]]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보스턴 지역에서 인망을 차곡 차곡 쌓아나갔다. 물론 백수는 아니었고 보스턴 지역에서 지방검사(DA)로 활약했지만, 월급을 받지 않았고 경력을 쌓기 위한 인턴십에 가까웠다. 그러던 중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존 F. 케네디]]가 당선되면서 존 F. 케네디의 지역구였던 매사추세츠 주 클래스 1 의석이 공석이 되었다. 테드의 나이 역시 상원의원 선서를 할 수 있는 30세가 되었고, 그렇게 1962년 치러진 매사추세츠 주 상원 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테드는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 선거를 위한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에드워드 매코맥 주니어[* 미국 하원의장인 존 W. 매코맥의 조카였다. 즉 미국 대통령의 동생 대 미국 하원의장의 조카가 치룬 결전이었던 샘.]를 69% 대 31%로 격파하고 본선에 진출, [[헨리 캐벗 로지]]의 아들 조지 C. 로지를 55% 대 42%로 크게 꺾고 당선되었다. 로스쿨 졸업 후 어떤 경력도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저 가문의 이름빨만으로 당선된거나 다름이 없던 셈. 이 때문에 테드 케네디는 형 로버트와 달리 당의 중진 의원들에게 언제나 공손하게 대했고 남부 의원들에게서 귀염을 받았다. 심지어 로버트와 존 모두를 경멸했던 [[린든 B. 존슨]] 부통령마저 테드 케네디는 좋아했고 그가 최고의 케네디가 될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악명높은 극우 인종주의자인 [[제임스 이스트랜드]]는 그런 테드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줬다. 그러면서도 묵묵하게 흑인 민권법을 비롯한 진보적인 입법 활동으로 경력은 부족할지언정 정치력은 부족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데 성공한다. 1963년, 형 존 F. 케네디가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테드 본인도 1964년 비행기 사고로 죽다 살아났다. 테드는 인디애나 주 상원의원인 [[버치 베이]]와 함께 민주당 전당대회 참석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에서 매사추세츠로 날아가고 있었는데, 악천후 때문에 비행기가 불시착해 한 과수원에 추락해 박살이 난 것이다. 테드 케네디의 보좌진과 비행기 조종사는 즉사했고, 테드 케네디도 비행기 잔해에 끼어 크게 다쳤다. 다행히 버치 베이 의원은 무사했고, 베이 의원은 그를 잔해 속에서 끄집어내 구급차를 불렀다.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갈비뼈가 몇개나 부러졌고 내출혈이 있어서 몇달간 병원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다. 이어 1968년 대선을 앞두고 형 [[로버트 F. 케네디]]마저 암살당하자, 테드는 큰 절망에 빠졌다. 테드는 로버트 케네디가 출마하지 않기를 바랬지만, 1968년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존슨 대통령이 [[유진 매카시]]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재선 불출마를 선언해 로버트 케네디가 뒤늦게 예비선거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로버트 케네디 진영 측에서는 불과 36세에 불과했던 테드 케네디를 대타로 세우자는 "Draft Ted" 운동을 벌였지만 테드 본인이 거부했고, 대신 로버트 케네디의 측근이었던 사우스다코타 주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이 로버트 케네디 측 선거운동원과 테드 본인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결국 조지 맥거번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휴버트 험프리]]를 꺾지 못하고 대통령 후보 지명권을 얻지 못했으나, 휴버트 험프리 그 자신도 1968년 대선에서 닉슨에게 패배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테드 케네디는 몇년만에 [[케네디 가문]]의 총아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는 1972년 대선에서의 선두주자였으며 이를 뒷받침하듯 1969년 1월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 의원 개개인의 표를 단속하는 지위로 민주당 원내 조직의 2인자이다. 당시 원내대표는 마이크 맨스필드.] 자리에 출마해, 현직 러셀 B. 롱[* 그 유명한 [[휴이 롱]]의 아들로 1960년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상원의원으로 불렸다.]을 31대 26으로 꺾고 원내총무의 자리에 오르는 이변을 일으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